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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씌워진 오해의 더께 걷어내기
허무주의, 염세주의, 절대적 관념론….
인구에 회자되는 불교라는 단어에 따라 붙는 꼬리표들이다.
기복이나 미신이라는 극단적인 폄훼는 아예 접어두기로 하자. 그래도 여전히 숙명이나 사주팔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으리라.
스탠스는 다르지만 이런 오해는 공부깨나 했다는 학자들이나 불교계 내부에서도 왕왕 벌어진다. ‘참나를 찾아서’ 같은 말들이 대표적이다. ‘나’라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다는 아트만ātman을 전면 부정하고 무아無我를 전면에 내세운 불교에 ‘참나’는 가당치 않은 말이다.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한 불교를 곡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 책은 이런 양극단의 오해의 더께를 걷어내기 위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20가지 주제, 비교와 대조를 통해 더욱 분명해지는 ‘불교’
이 책에는 흔히 불교에 대해 오해하거나 착각할 수 있는, 혹은 혼동할 수 있는 20가지 주제들이 펼쳐져 있다. 그 주제들 하나하나는 대비나 비교를 통해서 제시된다.
우선 연기론은 이원론과 무상은 허무와 무아는 자아와 업은 숙명과 함께 나온다. 반대편에 있는 것들을 이렇게 비교해 봄으로써 불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현실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낸다.
허무와 무상을 대조한 장을 살펴보자.
“흔히 불교는 무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허무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는 결코 불교가 아니다. 무상이라는 용어 때문에 불교는 허무주의로 오해를 받지만, 이런 오해는 무상이라는 말에 담긴 삶의 적극성과 긍정적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본문 39쪽 중)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무상이란 말에 담긴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벚꽃이 영원하기를 바란다거나 지나간 인연과의 이별이 덧없다하여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은 불교적 대안이 아니다. 삶은 무상하므로, 지금이라는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소중히 가꿔야 한다는 것이 무상의 진짜 속내다. 그런 점에서 무상은 과거나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를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다. 벚꽃이 모두 떨어졌다 해서 삶이 덧없다고 생각하거나 벚꽃이 만발했던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꽃이 지고 새롭게 피어난 연초록의 푸른 잎들에 대한 모독이자 현재를 사는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새로운 인연과 자신을 모독하는 삶이 바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본문 42쪽 중)
이 책에는 허무와 무상 같이 대비되는 주제도 있는 반면 지식이나 지혜처럼 이웃해 있는 문제들을 펼쳐놓기도 한다. 반대편과 비교해 봄으로써 오해를 없애는 방법이 한편에 있는 것처럼 이렇게 이웃해 있는 주제를 비교해 보는 건 혼동되는 주제들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작업이다.
그리고 3부에서는 그 주제를 더욱 넓혀서 이성과 신앙, 자력 종교와 타력 종교, 닫힌 종교와 열린 종교를 비교해 보기도 한다.
“불교는 인문학이다”
저자가 글을 쓰면서 내내 견지하고 있는 하나의 원칙 내지는 논조는 바로 “불교는 인문학”이라는 명제다.
“인문학은 일종의 자기 성찰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모색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불교도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자칫 왜곡된 신앙으로 흐르기 쉽다. 불교가 자신의 안위나 경제적 이익을 구하는 기복 불교로 흐르는 것은 바로 나와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차원에서 불교를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프롤로그 중)
여러 가지 주제를 비교해 보고 대조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고자 하지만 그 분명한 이해를 통해 저자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성찰이다.
믿음이 종교적 신앙이라면 이해는 인문학적 사유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바른 불교의 모습을 갖출 수 있다고 저자는 믿는다. 믿음만 강조되면 불교가 왜곡된 신앙으로 흐를 수 있고, 반대로 이해만 강조되면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신앙과 인문학은 불교라는 새의 양 날개다.”
이일야
본명은 이창구다. 일야一也는 법명이자 필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북대학교 철학과에서 학부와 석 · 박사과정을 마치고 전북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송광사 승가대학에서 철학과 종교학, 동양사상, 한국불교 등을 강의해 왔다. 보조사상연구원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나옹선의 실천체계」, 「진심眞心과 오수悟修의 구조」 등을 비롯하여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전북불교대학에서 연구처장을 맡으면서 불교사상과 경전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불교의 외연을 넓혀 이를 종교학이나 철학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데 관심을 갖고 연구 및 저술에 집중하고 있다.
머리말
프롤로그 인문학과 불교
1부 열린 세계
1 홀로일 수 없는 세계 _ 이원론 vs 연기론
2 불교는 허무주의인가? _ 허무 vs 무상
3 자아와 무아의 동거 _ 자아 vs 무아
4 ‘고苦’라는 문제의식 없이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_ 고통 vs 행복
5 정해진 운명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_ 숙명 vs 업
6 윤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_ 윤회 vs 해탈
7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_ 색즉시공 vs 공즉시색
2부 열린 마음
8 마음은 모든 것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_ 유심唯心 vs 여여如如
9 고행을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_ 고행 vs 중도
10 욕구에도 질이 있다 _ 나쁜 욕 구 vs 좋은 욕 구
11 솔직하고 당당한 삶 _ 노예 vs 주인
12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 _ 지식 vs 지혜
13 깨달은 사람도 바람에 흔들린다 _ 돌부처 vs 갈대
14 점치는 사람이 보살인가? _ 무속인 vs 보살
3부 열린 종교
15 구원에 이르는 길 _ 타력종교 vs 자력 종 교
16 파라다이스를 찾아서 _ 성속분리 vs 성속불이不二
17 넘을 수 없는 카테고리의 벽 _ 이성 vs 신앙
18 종교 언어의 진실 _ 사실 vs 상징
19 자신이 믿는 종교만 제일인가? _ 닫힌 종교 vs 열린 종 교
20 불교는 신비주의인가? _ 가짜 신비 vs 진짜 신비
에필로그
▦ 책 속으로
불교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고통이 가득한 사바세계라고 했으니, 이렇게만 본다면 염세적 아우라가 풍기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우리가 겪는 고통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니 다 포기하고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분명 불교는 염세주의가 맞다. 그러나 나의 현실이 괴로운데도 이를 애써 외면하거나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괴로운 상황은 결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괴로운 현실을 방치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찾아내서 제거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분명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문제의식이 없다면 행복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통 vs 행복> 본문 55쪽~56쪽 중
업설業說은 숙명론과 달리 인간의 자유 의지를 매우 강조한다. 즉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주체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업설은 주어진 결과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콩을 심었기 때문에 콩이 나오는 것이며, 팥을 심었기 때문에 팥이 나오는 것이다. 셋째로 업설은 행위에 따른 결과를 인정한다. 선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과보를 받는 것이며, 악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업설은 올바른 윤리의 기초가 된다. 한마디로 업설은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입장이다.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며 그에 따른 책임도 마땅히 감수한다는 것이 바로 업설이다.
<숙명 vs 업> 본문 72쪽 중
요즘 들어 윤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업과 윤회는 힌두교의 산물이며, 불교의 본질은 윤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와 무아에 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라 본다. 이러한 윤회의 문제는 현재 우리 삶을 중심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순간순간 윤회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속에서 말이다. 누군가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그를 금수에 비유하곤 한다. 겉모습은 사람이지만 그의 마음은 축생처럼 주위 사람들을 해치거나 그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가치관과 이념의 혼돈으로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사회는 아수라의 세계와 같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힘없는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은 부에 굶주린 아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렇듯 우리의 실존과 관련지어 윤회를 이해하는 것이 붓다의 합리적 가르침에 부합하는 길이 될 것이다.
<윤회 vs 해탈> 본문 78쪽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