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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에도 역사와 문화가 있다
# 장면 하나
사찰의 전각이나 일주문에는 유독 조선의 왕이 쓴 글씨[御筆]가 눈에 띈다.(불국사 대웅전, 마곡사 영산전, 선암사 대복전 등) 유교를 숭상하던 서원에서도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왕이나 왕의 친척의 명복을 빌던 원당이 사찰 안에 세워졌던 경우 외에도 이런 일은 흔했다. 숭유억불의 시대 사찰은 심심하면 유생들이 가서 행패를 부리던 곳이다. 이런 폐해를 조금이라도 막아보기 위해 사찰은 앞다투어 왕이나 왕의 친척(대원군 등)이 쓴 글씨를 내걸었다.
# 장면 둘
밀양의 영남루는 그 규모가 정면 5칸 측면 4칸에 불과하지만 한때 300개에 이르는 현판이 걸려 있는 ‘현판 경연장’이었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혔던 이곳에는 글씨나 학문으로 이름 깨나 날렸던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글씨를 내걸었다. 지금도 조윤형, 이황, 이색, 문익점 등 당대 학자와 명필들의 글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현판은 ‘영남루嶺南樓’와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는 글씨다. 1843년 각각 7세와 11세가 되는 소년들은 자신의 키보다 더 큰 현판의 글씨를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이 현판 앞에 당대 명필의 글씨는 가뭇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 장면 셋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한다. 불은 거침이 없었고 금세 모든 걸 삼켜버릴 기세였다. 모두 손을 놓고 있을 즈음 다급한 명령이 떨어진다. “현판을 사수하라!” 추사 김정희도 서울에 들르면 그 앞에 서서 한참을 올려다봤다는 숭례문 현판은 누가 보아도 명필이었다. 소방대원 두 명이 다급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10여 분의 톱질 끝에 현판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현판이 떨어지고 10분쯤 지나 숭례문은 완전 전소되었다. 현판도 사람의 목숨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여하튼 그 덕분에 숭례문의 옛 현판만은 지금도 복원된 숭례문 위에 걸려 있다.
이렇듯 이 땅에 남아 있는 ‘현판’에는 많은 사연이 담겨 있고, 남아 있다. 혹자를 이를 ‘역사’라 하고 혹자는 ‘문화’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런 역사의 현장, 문화의 현장을 하나하나 발로 답사하고 글로 그리고 사진으로 남겼다.
아무나 쓰지 못했던 현판 글씨
현판 글씨는 다른 글씨와 다르게 대단한 공력과 실력이 요구된다. 그런 만큼 아무나 쓸 수 없었다.
중국 삼국 시대의 대표적 서예가로 위탄韋誕(179~253)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여러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현판 글씨가 백미였다고 한다. 위탄이 제서를 쓴 일과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위나라 명제가 높은 누각을 짓고 이름은 ‘능운대凌雲臺’라고 정한 뒤, 글씨를 쓰지 않은 현판을 걸어 놓았다. 그러고는 위탄에게 커다란 바구니에 들어가게 한 뒤 도르래를 이용해 지상에서 25자(약 7.5미터)나 되는 허공에 매달아 놓고 거기서 글씨를 쓰게 했다.
위탄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큰 공포를 느끼며 혼신의 힘을 다해 글씨를 써야 했다. 그런데 위탄이 글씨를 쓰는 순간을 지켜본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그의 머리카락이 삽시간에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이었다. 위탄이 얼마나 엄청난 기력을 쏟았는지를 말해 주는 일이라 하겠다. 위탄은 이 일이 있은 후 다시는 현판 글씨를 쓰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후에 후손이 지켜야 할 가문의 법도를 적은 항목을 남기면서, 자손들은 절대 현판 글씨를 배우지 못하도록 한 항목을 넣었다 한다.
물론 일부는 후대 사람들이 가감한 이야기겠으나 현판 글씨를 쓰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공력과 실력을 요구하는지 알려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 비해 현판은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판이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추사 글씨인 봉은사 ‘판전板殿(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 현판과 명종 글씨인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0호)’ 현판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현판 글씨는 특히 금석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大자 글씨의 특별한 서체와 서풍을 다양하게 살필 수 있다. 그런데도 그 가치는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선조들은 건물이 화재나 풍수해 등으로 소실되거나 파괴될 때도 현판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밀양에 영호루 현판이 대표적이다. 특히 영호루는 건물이 소실된 이후에도 현판 하나가 있었기에 다시 복원되는 역사를 갖고 있기도 했다.
처음 떠나는 ‘현판기행’
그동안 궁궐의 현판이나 사찰의 주련 등에 대해 다룬 책은 한두 권 출간된 적이 있다. 하지만 궁궐, 고택, 사원, 사찰, 정자, 누각 등 우리의 옛 현판에 대해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교양서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비록 ‘기행’이라는 이름을 달기는 했지만 이 책은 정설과 야사를 포함한 ‘역사’ 그리고 당대 학문의 흐름과 서체의 발달 등 ‘문화’에 대해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옛 현판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말한다. 글씨 자체가 가진 가치뿐 아니라 그 문구가 담고 있는 의미가 주는 가르침, 그 현판에 담긴 일화, 글씨를 쓴 서예가의 예술혼 등 유무형의 값진 유산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 역시 다양하다.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에서부터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도 인정했던 김종호의 글씨까지. 사찰, 서원은 물론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에서 마음에 점을 찍던 정자까지 우리나라 현판의 역사를 모두 훑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특히 부록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서, 예서, 행서 등 서체의 종류와 변천사에 대해서도 친절히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현판이 걸린 장소에 따라 네 개의 장으로 나뉜다. 첫째 장인 「정자와 누각에 걸린 현판」에서는 옛 선비들이 올라 자연의 풍광을 감상하던 ‘정자’와 ‘누각’에 걸린 현판을 살펴보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둘째 장인 「서원과 강당에 걸린 현판」에서는 조선 유학의 산실인 서원과 강당에 걸린 현판을 소개한다. 선비의 삶과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는 현판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셋째 장인 「사찰에 걸린 현판」에서는 전국 각지의 절과 암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다양한 현판을 소개한다. 넷째 장인 「더 알아보는 현판 이야기」에서는 고택이나 궁궐, 중국 자금성 등에 걸린 현판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이어 간다.
모두 35곳의 이야기가 담겼다.
글·사진 / 김봉규
1959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조폐공사 등에서 근무하다 1990년 <영남일보>에 논설위원으로 입사했다. 그 후 편집국 기자와 부장을 거쳤고 현재는 편집위원으로 근무 중이다.
인문학에 관심이 많으며,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의 ‘혼’과 ‘문화’에 대한 글을 주로 써왔다. 지은 책으로 『불맥佛脈, 한국의 선사들』, 『마음이 한가해지는 미술 산책』, 『길 따라 숲 찾아』,『머리카락 짚신』(칼럼집), 『한국의 혼- 누정』,『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 등이 있다.
현판기행을 시작하며
1. 정자와 누각에 걸린 현판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보다
경북 안동 ‘영호루’/ 경북 안동 봉정사 ‘덕휘루’/ 경남 밀양 ‘영남루’/ 강원 삼척 죽서루 ‘제일계정’/ 경북 안동 ‘추월한수정’과 ‘탁청정’/ 경북 봉화 청암정 ‘청암수석’/ 강원 강릉 선교장 ‘활래정’/ 경남 진주 ‘촉석루’/ 전남 담양 ‘식영정’, ‘제월당’
2. 서원과 강당에 걸린 현판
선비의 정신을 담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경북 예천 삼강강당 ‘백세청풍’/ 경북 안동 ‘도산서원’/ 경북 경주 안강 ‘옥산서원’/ 경북 경주 ‘용산서원’/경남 산청 덕천서원 ‘경의당’/ 전남 장성 필암서원 ‘확연루’/ 경북 안동 송암구택 ‘관물당’, ‘한서재’
3. 사찰에 걸린 현판
절집에서 듣는 이야기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전북 완주 화암사 ‘극락전’/ 경북 영천 은해사 ‘불광’/ 경남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경북 의성 고운사 ‘연수전’/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경남 하동 쌍계사 ‘육조정상탑’/전남 구례 천은사 ‘지리산천은사’/ 경북 칠곡 송림사 ‘대웅전’/ 전남 순천 송광사 ‘세월각’, ‘척주당’/ 경기 남양주 봉선사 ‘큰법당’/ 경남 양산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4. 더 알아보는 현판 이야기
경북 영덕 난고종택 ‘만취헌’/ 대구 달성 ‘삼가헌’/ 서울 ‘숭례문’/ 경북 안동 농암종택 ‘애일당’/ 경북 울진 ‘대풍헌’/ 중국 자금성 ‘건극수유’
# 이야기 하나
임금인 선조는 도산서원에 대해 나라에서 편액을 내리기로 하고, 당대 최고 명필인 석봉 한호에게 편액 글씨를 쓰게 하기로 결정했다. 1575년 6월 어느 날, 선조는 석봉을 어전에 불러 편액 글씨를 쓸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무엇을 쓸 것인지 알려 주지 않고 부르는 대로 쓰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라고 하면, 젊은 석봉(당시 32세)이 퇴계와 도산서원의 명성이나 위세에 눌려 글쓰기를 양보하거나 마음이 흔들려 글씨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순서는 거꾸로 하기로 했다.
선조는 그에게 첫 글자로 집 ‘원院’자를 쓰라고 했다. 석봉은 ‘원’자를 썼다. 다음은 글 ‘서書’자를 쓰게 하고, 이어서 ‘산山’자를 쓰도록 했다. 석봉은 쓰라는 대로 여기까지는 잘 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떤 편액 글씨를 쓰는지 몰랐다.
마지막 한 자가 남았다. 바로 질그릇 ‘도陶’자다. 이 자를 말하면 석봉도 도산서원 편액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조는 ‘도陶’자를 쓰라고 했고, 석봉은 그때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자를 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붓을 떨며 가까스로 ‘도’자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쓴 ‘도’자가 다른 세 자와 달리 약간 흔들린 흔적과 어색한 점이 있다고 전한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본문 122쪽)
# 이야기 둘
‘애일당愛日堂’ 편액 글씨와 관련해 일화가 전한다.
농암은 제자를 중국에 보내 중국 최고 명필의 글씨를 받아 오게 했다. 제자는 몇 달 만에 중국에 도착했고, 다시 그 명필을 찾아 한 달을 헤매었다.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명필을 수소문해 찾아 ‘애일당’ 글씨를 청했다. 그 사람은 뭐 보잘것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느냐면서, 산에서 꺾어온 칡 줄기를 아무렇게나 쥐고 듬뿍 먹을 찍더니 단숨에 ‘애일당’ 석 자를 써서 내주었다. 하지만 농암의 제자는 명필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했다. 좋은 붓으로 정성스레 글씨를 써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는 내심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써 줄 수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 하더니 종이를 가볍게 두세 번 흔들었다. 그러자 세 글자가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의 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때서야 제자는 자신이 잘못한 줄 알고 다시 써 줄 것을 빌었다. 그러나 명필은 끝내 써주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면 자신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라 했다. 제자는 할 수 없이 그가 말한 대로 산 아래에 있는 명필을 찾아갔다.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분이 저의 스승으로 남에게 글씨를 주지 않는 분인데, 특별히 조선국에서 왔다 하여 써 준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씨는 스승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학 한 마리는 정도는 날려 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글씨를 써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글씨를 받아 돌아온 제자는 농암을 볼 낯이 없어,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안 해 주다가 그가 세상을 뜨면서 고백해 알려졌다고 한다.
-「경북 안동 농암 종택 애일당」(본문 318~319쪽)
부록
현판이란…
현판이란 주로 널빤지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 건물의 문 또는 벽에 거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건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표지인 것이다. 현판의 역사는 대략 중국 진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하면서 현판에 주로 쓰이는 글자체도 정리되었다. 진나라 8서체 중 여섯 번째인 서서(署書)가 건물의 명칭 등을 쓰는 데 사용됐다. 그 후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위탄(韋誕)이 능운대의 현판 글씨를 쓴 기록이 있고, 당대(唐代)에는 불교 사원이 건립되면 제왕이 현판을 하사하는 관습이 성행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각종 문헌에 현판에 대한 기록이 있어 삼국 시대부터 현판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성문, 전각, 사찰, 서원, 주택 등에 널리 현판을 걸었다.
현판에는 주로 나무판을 사용하고, 건물의 규모와 성격에 맞게 다양한 색과 장식을 더한다. 글자는 나무판에 직접 쓰거나, 아니면 따로 써서 새기기도 했다. 글자에는 먹은 물론이고, 아교에 금가루를 섞은 금니(金泥), 조개껍질을 갈아 만든 호분(胡紛) 등 갖가지 재료를 사용했다. 건물의 얼굴인 현판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그냥 보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현판에 쓰이는 글씨도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니다. 굵은 필획으로 써서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해진 글씨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짜임새가 있고 강건하게 보이는 해서(楷書)가 많이 쓰였다. 특히 유행한 것은 고려 때 원나라에서 들어온 ‘설암체’나 조맹부의 ‘송설체’ 등이었다. 설암체의 경우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 유행했다. 물론 해서 외에도 전서나, 예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글씨체가 사용되어 지금도 전국 곳곳의 서원, 사찰 등에서 그 현판들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