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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하게 단순하게 소소하게, 하지만 간절하게
수행자의 글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또 때로는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매일 매일 반추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일상의 목표와 속도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너무나 선명한 장면도 놓치고 살 때가 많다. 하지만 멈추고 돌아보면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명징해 보이는 법이다.
현진 스님이 순간순간을 수시로 돌아보며 반추하는 삶에서 우리에게 내놓은 이야기는 바로 느슨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다.
나뭇가지의 눈을 털어 주면서 가진 것이 적으면 근심도 줄어든다는 걸 배웠다. 가지가 적거나 잎을 지니지 않은 나무들은 눈의 무게를 피해 갔지만, 가지가 큰 나무들은 눈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긴 가지가 여름에는 그늘을 만들지만, 겨울에는 그 길이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보는 셈이다.
세상에는 이처럼 장점이 때로는 단점이 되는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떨 땐 재주 없는 단순한 삶이 세상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주렁주렁 매달고 있으면, 그 욕심의 무게 때문에 결국은 몸이 상하거나 재산을 잃기 쉽다.
<폭설 앞에서> 중 본문 209~210쪽
이런 단순한 삶의 추구는 결국 소박한 생활로 이어진다.
누구나 하루하루의 생활 때문에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몸은 속진(俗塵)에 있더라도 마음은 이런 삶을 즐기고 동경할 줄 알아야 현재의 고난을 위로받을 수 있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꾸어 보라. 종래에는 그 꿈이 내 삶의 방향을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반일정좌 반일독서> 중 본문 153쪽
하지만 단순하고 소박하기만 하다면 그건 은거에 다름 아니다. 도가(道家)의 삶이지 불가(佛家)의 삶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정작 스님이 묻고 있는 건 매 순간 우리는 ‘간절하게 살고 있는가’이다. 삶이 수행이 간절해질 때 그 삶이 추구하는바, 수행이 목적하는바에 다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가끔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출가하던 그 시절의 간절함으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어쩌면 명쾌한 답을 아직도 찾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간절함이 사라지면 삶의 방향을 상실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스님에게 책을 선물 받았는데 표지 뒷장에 이렇게 써 놓았다.
‘그대 지금 간절한가?’
하루하루 얼마나 간절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간절함은 그 삶에 대한 소중함을 부여한다. 어제 죽은 이에게는 오늘 하루가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대 지금 간절한가?> 중 본문 11쪽
스님은 이런 간절함이 진지하고 철저한 삶의 배경이 된다고 말한다.
물론 쉽지 않다. 느슨하고, 단순하고, 소소하면서 간절하게 산다는 건. 하지만 스님이 발을 옮기는 산길을 따라 꽃과 나무를 보다 보면 그 경계 속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연은 우리에게 겸손함을 선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글쟁이 스님의 아홉 번째 이야기
현진 스님을 따라 다니는 수식어 중 하나는 ‘글쟁이’다. 불교계 문사(文士)의 배출처라고 하는 월간 <해인>의 편집위원을 역임하기도 한 현진 스님은 그동안 『두 번째 출가』(1997년)를 시작으로 『삭발하는 날』(2001년), 『산문, 치인리 십번지』(2003년), 『오늘이 전부다』(2009년), 『번뇌를 껴안아라』(2013년) 등 여덟 권의 책을 내 모두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동안 스님의 글쓰기 소재는 주로 ‘출가 수행’이나 ‘동서양의 경구’들이었다. 하지만 ‘청주의 조계사’라 불리는 관음사를 떠나 3년 전 마야사라는 산 아래 작은 암자에 자리 잡은 스님은 이제 그 앞에 서면 한없이 작고 겸손해지는 꽃과 나무 그리고 계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선방에 앉아 화두를 들거나 포교를 위해 저자거리로 나선 스님의 모습을 기대한 것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한여름 마당의 풀과 씨름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말하는 스님의 글 속에는 또 다른 수행의 연륜이 숨어 있다. 그래서 스님의 글은 행간을 넘어갈 때마다 긴 여운을 남긴다.
책장을 넘기며 꽃이며 나무의 향기를 듬뿍 맡을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은 제공한다.
현진
월간 『해인』 편집위원과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동안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로 절집의 소소한 일상과 더불어 불교의 지혜와 교훈들을 독자들에게 꾸준히 전달해 왔다. 그의 글은 마치 사람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진솔하며, 또한 짧은 호흡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삶의 철학과 진리를 쉽고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어서 더욱 흡인력이 있다.
최근까지 서원대학교 강사와 법주사 수련원장을 맡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청주 근교에 마야사를 창건하여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삶을 살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삭발하는 날』 『잼있는 스님이야기』 『산문, 치인리 십번지』『두 번째 출가』 『오늘이 전부다』 『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 『언젠가는 지나간다』 『번뇌를 껴안아라』 등이 있다.
▦ 목차
그대 지금 간절한가?
그대 지금 간절한가?
흐름을 살펴라
고난 예찬
내 인생의 절반은 어머니 것이다
매화꽃이 피려 하네
나무 이야기
풀이 무섭다
이름 짓기가 어렵다
귀만 중요하게 여기지 마라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삶의 쉼표를 만나라
나라를 누가 다스리건 무슨 상관이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칠석날 아침에
빚지고 살았는가 빚 갚고 살았는가?
활과 화살이 되어라
식사대사
매미에게 들으라
이런 짓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을까
호박이 좋더라
남의 떡에 관심 갖지 말라
모두가 한때다
즐거운 스트레스
몸을 뒤흔들 것이다
여름 부채를 치우면서
빚지는 삶을 살지 말길
완전한 봄날은 없다
길에서 길을 묻는가?
가까이 있는 사람이 부처다
진리나 교리에 구속되지 말라
평범함이 특별한 것이다
주인이 따로 있다
반일정좌 반일독서
비 오는 가을 아침에
불일암을 다녀오다
오늘은 당신들의 생일이다
걷기 좋은 길에 지뢰가 더 많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행복의 꼬리를 따라가면 안 된다
빠른 속도는 재미없다
봄날 투정
달빛 아래에서
농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가을이 가네
과실나무들의 고마움
낙엽을 쓸면서
폭설 앞에서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지 말라
이부자리에 부끄럽지 않은 잠
새해 달력을 걸고 나서
▦ 책 속으로
내가 출가하던 그해도 오늘처럼 스산한 겨울 길목이었다. 절 근처 사하촌(寺下村)에 도착했을 때 내 주머니에는 약간의 지폐와 동전이 남아 있었다. 그때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인가를 떠올려 보았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빵이었다. 가게에서 호빵을 맛나게 사 먹고 초콜릿도 하나 사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무 미련 없이 숲길을 걸어 산문(山門)속으로 들어갔다.
(중략)
내가 출가할 때의 그 간절함은 생에 대한 의문이었다. 자신이 지니는 간절함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스스로 답을 향해 걸어가게 된다. 나 또한 그 답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출가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가끔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출가하던 그 시절의 간절함으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어쩌면 명쾌한 답을 아직도 찾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간절함이 사라지면 삶의 방향을 상실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스님에게 책을 선물 받았는데 표지 뒷장에 이렇게 써 놓았다.
‘그대 지금 간절한가?’
<그대 지금 간절한가?> 본문 (10-11쪽) 중
봄꽃들은 겨울을 이겨 내고 봄을 맞이한다. 인고의 과정을 무시하고 성급하게 피지 않는다.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든 속도 문화는 성급한 생활 습관을 만들어 주었지만 무엇이든지 단박에 되는 것은 없다. 노력과 반복이 삶의 질서를 완성해 준다. 자연의 질서가 아름다운 것은 빠른 속도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봄꽃들이 서로 앞서겠다고 개화의 순서를 바꾼다면 자연은 심각한 홍역을 앓을 것이다. 자연이든 삶이든 자신의 속도와 질서를 지킬 때 비로소 아름답다는 것을 배운다. 내 삶에서도 성급함을 경계하고 조심하며 살고 싶다.
<‘빠른 속도는 재미없다> 본문 (189쪽)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