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형인 하림 스님과 절어서 자란 저자가 큰 사랑으로 보살펴 주고 가르침을 주신 은사이신 지하 스님의 희수연을 맞이하여 축하하는 마음과 감사함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스님이 정원』을 출판했다. 저자의 솔직하고 위트 넘치는 문장과 어릴 때를 회상하는 이야기는 읽는 이에게 환한 웃음을 주고 때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안겨 준다.
“BTN 우리들의 토크쇼 세상만사에 출연한
하림 스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슴 따뜻하고 소중한 이야기로
저자의 눈을 통해 본 은사 지하 스님과
형 하림 스님 그리고 슬프기는 해도 아프지만은 않았던
지난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가슴에 남아 있는 따뜻한 기억을 모아
우리 스님께 깊은 사랑을 드립니다!
“이 글은 서른일곱 젊은 나이에
말썽꾸러기 어린 남자 아이 둘을 절에 데려와
건강하게 잘 키워 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의 글이기도 하고,
스님과 함께했던 날들을 돌아보며 속가에 사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생각해 본 글이기도 하다.”
---「서문」중에서
지문조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여 지리산 영원사, 실상사, 쌍계사, 소요산 자재암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의정부고등학교와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법인 한울에 재직하였으며 현재 노무법인 해마루 대표로 있다.
희상 스님
경북 청도 운문사 운문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미술학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하였으며 해인사 선원 및 제방 선원에서 수행하였다. 독일 브레멘국립조형예술대학교에서 현대미술을 전공(Diplom)하였으며 현재 부산 해운대 유연선원 주지로 정진하고 있다.
발우 공양과 밥상머리 교육 - 146 / 스님으로 산다는 것 - 155 / 다 마찬가지야! - 160
참선이 뭐야? - 167 / 재롱잔치 - 173
감사의 글 ② - 181
스님의 꽃나무 자랑은 하루 종일 해도 끝이 없어 보인다.
“절 마당에 있는 보리수는 하림이가 가져다준 거고, 이거는 중암이가 보내 준 치나무. 우리나라 높은 산에 있는 치나무가 보리수처럼 향이 참 좋거든. 중암이가 봉암사에서 하안거 끝나고 캐다가 갔다 줬는데 물을 자주 줘도 잔뿌리가 없으니까 자꾸 말라 죽더라고. 잘 키운다고 하는데 잘 안 돼.”
스님의 뒷동산에는 전국 각지에서 정성을 쏟아 옮겨 심은 나무들이 가득하다. 봉암사와 정혜사에서 안거를 마치고 나올 때 스님께서 직접 캐다 심은 것도 있고, 상좌들이 귀한 나무라고 가져다준 것도 많다. 그것도 모자라 스님께서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사다 심은 나무들도 있다.
어느새 박박 민 스님의 정수리 부분에서 땀이 봉긋 솟더니 이마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스님의 정원에 대한 자랑은 끝이 날 줄 모른다.
--- p.20~21
광명역에서 하림 스님을 만났다. 멀리서 보고도 바로 알겠다. 피가 당기고 뭐 그런 것은 아니다. 웬 스님이 오른쪽 어깨에 깁스를 하고 왼손으로 엉거주춤 배낭을 들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단정하게 입어야 할 겉옷은 반쯤 걸쳐진 채 언제 바닥에 떨어질지 모르는, 누가 봐도 한눈에 띄는 고상한 자태로 보아 틀림없는 하림 스님이었다.
남들 보기 창피하게도 이 스님은 축구에 미쳐서 허구한 날 발목에 붕대를 감았다가, 손목에 붕대를 감았다가, 허리에 붕대를 감았다가 하더니 이번에는 어깨가 부러져서 한동안 입원까지 했다. 이런 분은 늘 옆 사람이 괴롭기 마련이다. 배낭을 받아 들었다.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고민하다가 돈이 좀 아깝긴 하지만 ‘팔 병신’ 데리고 버스 타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고생시키느니 택시를 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 p.25
지금까지 살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단연 실상사에서 살던 때라 하겠다.
찬바람이 불어 밤이 떨어질 때면 새벽같이 동네 아이들이 절로 들어와 밤을 주워 갔는데, 그렇다고 스님께서 그 아이들을 혼내거나 내쫓지는 않으셨다. 그저 우리도 새벽 예불을 서둘러 마치고는 마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손전등을 들고 밤을 주울 뿐이었다.
실상사에는 아직도 그 옛날 우리가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후불탱화(법당 안 부처님 뒤편에 걸어 놓은 그림)이다. 과거에는 절에 도둑이 들면 훔치기 편하고 돈이 되겠다 싶었던지 후불탱화를 오려서 돌돌 말아 훔쳐 가는 일이 간혹 있었다. 실상사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스님이 후불탱화를 다시 만들어야 했는데 그 그림 아래에 조그맣게 제작 일자와 함께 당시 실상사에 살던 스님과 보살님 그리고 나와 하림 스님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지금도 실상사에 가면 그 시절의 우리 이름을 만날 수 있다.
--- p.41~45
결국 난 고등학교를 마치고 산을 내려왔다. 절에 살면서 이 모든 욕망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림 스님은 나와 달리 스님의 같은 물음에 우물쭈물하다가 머리를 깎았다. 당시 어린 나이에도 하림 스님은 나와 자신 둘 중 하나는 머리를 깎는 것이 스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 동생이 절대 머리를 깎을 생각이 없다고 하니 할 수 없이 자신이 머리를 깎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스님이 가끔 하림 스님에게 “문조는 빠릿빠릿해서 밖에 나가 뭘 해도 먹고 살겠지만 너는 밖에 나가면 못 살 거다.”라고 하셨던 말씀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