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벗에게』는 편지글을 담은 산문집이다. 문자 메시지와 SNS 시대에 구닥다리(!) 매체인 ‘편지’ 형식을 택한 이는 「월간 해인」 편집장이자 두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 도정 스님이다.
“오래되고 다정한 벗일지라도 내 속내를 드러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만나고 어울려 즐거운 한때를 같이 보냈더라도 헤어지면 늘 허전하고 아쉬운 부분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 허전하고 아쉬운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편지였다.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눌러쓰듯 정성껏 써 내려간 편지는 그 자신을 향한 솔직한 독백이기도 하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회인으로서, 깨달음을 구하고 자비를 실천하려 애쓰는 수행자로서, 유달리 잘 울고 잘 웃어 얼굴 가득 멋진 주름이 진 중년 사내로서의 삶과 성찰이 담긴 독백. 산문이지만 어린 쑥이 품은 ‘봄 향기’에 감동하는 시인의 감수성과 담박한 시어(詩語)도 듬뿍 담겨 있다. 아주 오래 끓여 깊고 진한 곰탕을 청아한 사기그릇에 담아낸 그런 느낌이라면 이해가 가실는지.
시인의 눈과 수행자의 가슴으로 본
자연과 사람, 세상사에 대한 통찰이 담긴 117편의 편지글
스님의 편지글에는 절 마당을 쓰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인연을 맺은 이들의 사연, 세상사에 대한 생각, 수행자로서의 고민이 고루 담겨 있다. 담담히 써 내려간 글들은 일상에 대한 공유나 감정의 토로를 넘어서 현상 이면의 숨은 의미를 찾아내고, 사소한 일상에서 삶의 이치를 통찰한다. 이를테면 외로운 감정을 느끼며 “만남이란 그 사람의 소중함을 새삼 확인하는 일(본문 33쪽)”임을 알아차리고, 시골 밤길을 걸으며 “뭐든 자세히 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두려움도 사라졌다네. 진짜 어둠은 밤에 속한 게 아니라 어리석음에 속한 것(본문 143쪽)”임을 깨닫는다.
같은 사물도 시인의 눈으로 보면 다른 법인가 보다. 대나무를 마주하고는 “휘면서 자란 대나무를 대나무가 아니라고 하지 못하듯이 타인을 그리 고까운 시선으로 보지는 말아야겠네. 그도 소중한 존재일 따름 아니겠나(본문 106쪽)” 하고 나직하게 이른다.
수행자답게 미움과 원망, 서운함으로 출렁이는 마음을 성찰한 글도 여러 편이다. “섭섭한 일이 생겼다는 것은 뭔가 용납되지 못한 게 있다는 것이었네. 용납되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그에게, 또는 그가 나에게 포용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네. (중략) 살면서 포용의 주체가 내가 되고, 내가 주인공일 때 걸림이 없을 것이었네. 사람의 그릇이란 원래 한정이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었네. 다만, 스스로를 한정 지어 섭섭함을 만들었을 뿐이었네(본문 85쪽)” 하는 대목에서는 뜨끔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앞만 보며 내달리느라 사나워진 마음을
부드럽게 보듬는 스님의 순한 말과 사유
스님의 편지글 중에는 1쪽도 안 되는 짧은 글이 많다. 쉽고 순한 말들이어서 술술 읽히고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이 많다.
“역경은 역경이 아니야. 그렇게 씨앗도 껍질을 벗어야 떡잎을 내거든(본문 28쪽).”
“우리는 자꾸 잊지. 이렇게 피었다 지건만, 필 때는 누구나 영원한 줄 아네(본문 52쪽).” “무언가를 꼭 해야 된다는 생각을 굳이 낼 필요는 없었네(본문 144쪽).”
앞만 보며 내달리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내 마음 그리고 소중한 벗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보듬어 준다. 벗은 스님 말대로 “친구일 수도 있고, 아내나 남편 때로는 자식이나 형제일 수도” 있을 터. 오늘 사랑하는 벗에게 이 순하고 어여쁜 말들을 편지에 옮겨 적어 보내는 건 어떨지.
지은이_ 도정
하동 쌍계사에서 원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양산 통도사에서 고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시 ‘뜨겁고 싶었네’로 등단, 시집 『정녕, 꿈이기에 사랑을 다 하였습니다』와 『누워서 피는 꽃』을 펴냈다. 산문집 『우짜든지 내캉 살아요』와 경전 번역 해설서인 『보리행경』 『연기경』도 펴냈다. 현재 「불교신문」에 ‘시인 도정 스님의 향수해’를 연재 중이며 「월간 해인」 편집장을 맡고 있다.
그린이_ 김화정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미술실기과정(동양화)을 수료하고 전업 화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현재 구루누이 미술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작업에 대해 “억만 겁의 시간이 쌓
인 인연으로 새벽이슬처럼 맑은 도정 스님의 글에 그림을 얹게 됐다”고 말한다.
1부 외로움은 사랑을 빛나게 하네
2부 부디, 모진 말은 하지 마세나
3부 열매 하나 맺는 건 우주를 여는 일이었네
4부 사람이 밥값 하며 사는 세상이면 참 좋겠네
● 누군가에게 충고를 한다는 건 참으로 시의적절해야 하고 신중해야 하고 한편, 조심스러워야 하였네. 그런데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는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네. 세상에는 병도 많고 약도 많지만 내 자신이 병든 것을 모르는 그 병이 가장 무서운 것이었으니 말이네.
_본문 24쪽
● 요즘은 나쁜 짓 하는 사람이 더 잘 살고, 남 해코지하는 사람이 더 잘 살고, 남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이 더 잘 사는 세상이라고 하더군. 그러고 보니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네. 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우리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네. 그래서 많이 슬펐네. 그래도 나는 믿어야겠네. 반드시 인과(因果)는 엄중히 적용될 거라고 굳게 믿어야겠네. 그 인과를 믿는 착한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이 이나마 유지되는 것이라고 거듭거듭 또 믿어야만 하겠네. _본문 30쪽
● 의사가 병을 다 고치면 죽는 이가 어디 있겠으며, 사람마다 선비가 되면 농사는 누가 짓겠는가. 우리 할매가 늘 하던 말이네. 기도마다 다 이루어지면 자신의 노력이 오히려 헛된 노릇이 되지 않겠는가. 어쩌면 말일세. 그러고 보니 삶의 어려움들이 사람을 간절하게 하는 것 같네. 기도하면서 어려움이 닥치고 숱한 번뇌도 생기는 일이 원력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고 정진하게 만드는 스승이기도 하였네. 그 스님은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웃었거든. 그런 면에서는 세상에 고맙지 않은 괴로움은 하나도 없었네. _본문 56쪽
● 하나의 돌이 잔잔한 호수에 떨어져 파문이 일기 시작하면 호수 수면이 다 그 파문에 흔들린다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잔잔한 호수에 겁도 없이 함부로 돌을 던지며 살았던가. 한 사람을 만나고 또는 한 가지 현상을 만나는 일은 하나의 거대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일이었네. _본문 88쪽
● 참 할 말이 많지만, 여전히 무엇을 아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핵심이었네. 무엇이 깨달음인가. 무엇을 깨달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는 이런 것들도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와서는 고개를 못 드네. _본문 1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