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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하는 지혜의 나침반 「금강경」 읽기
「금강경」은 붓다가 29세에 출가해 6년간 수행한 뒤, 20여 년이 지난 50세 초반부터 21년간 설한 ‘육백반야六百般若’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경전이다.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이 본래 이름으로 ‘금강같이 단단한 지혜로써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붓다의 말씀’이다. 기원전 150~200년경 결집되었으며, 범어로 된 원문을 전문 5149자로 한역漢譯하여 팔만대장경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논리적인 경문으로서 『반야심경』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한동안 ‘한국불교는 금강경불교’라고 회자될 만큼 대중적인 불교경전이자 인문학으로 일컬어지는 「금강경」이지만 막상 경전의 전체를 꿰뚫는 ‘공사상’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용해야 하는지, 그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역자는 「금강경」 총 32분을 읽어 나가는 과정이 본래면목, 즉 존재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공空’을 아는 것은 완전한 무無를 아는 것이 아니라 가아假我를 버리고 진아眞我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최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근본은 참나를 깨닫는 것이고, 그 길이 금강경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을 안내하기 위해 역자는 경문의 원문과 본래 뜻풀이[字解], 역자의 해설[講解]를 차례로 실어 경문을 반복해서 읽으며 자연스럽게 경문의 내용을 익히도록 했다. 여기에 「금강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훌륭한 길잡이로 꼽히는 「금강경오가해」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였다. 「금강경오가해」는 규봉 종밀, 육조 혜능, 부대사, 야부 도천, 예장 종경 등 다섯 조사가 설한 「금강경」의 주석을 조선 초기 함허 득통 스님이 집대성한 것으로, 경문과 역자의 해설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적절한 구절을 가려 뽑아 오가해를 따로 읽지 않아도 충분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금강경오가해」를 편찬한 함허 득통 선사의 설의를 비롯해 불교와 유학의 경계를 오가는 대가들의 금구를 덧붙이고 관련 설화를 수록하여 강독의 깊이를 더하고 안목을 넓혔다.
역자의 강해와 조사 스님들의 주석을 따라 가다 보면 “설한 바 설한 것이 없으며, 중생을 제도한 바 한 중생도 제도한 바 없다.”는 붓다의 의중과 「금강경」이 인도하는 깨달음의 자리에 닿게 될 것이다.
서재홍(徐在鴻)
부산에서 태어났다. 동아대학교 석사과정으로 인도철학을 이수하고, 박사과정으로 부산대학교에서 중국철학을 이수하였다.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부산지부 사무국장, 법무부산하 청소년교정위원, 부산차인연합회 초대 사무국장, 아산학회 학술위원 및 <亞山會報> 편집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2006년 ‘東西茶文化硏究所’를 개설, 현재 차 문화와 관련한 古文을 강독하고 있다.
「格物致知의 보편적 이해와 사회적 변화」(아산학회, 2001), 「宋朝六賢의 易學思想과 해석학적 新儒學」(아산학회, 2008), 「哲學과 道學」(茶와 인생, 2009), 「禮와 樂의 상관관계와 긴장관계」(禮茶文化연구소, 2010), 「無量壽經宗要를 통한 元曉의 淨土思想」(동아대학교, 2012), 「仁禮義智는 한국인의 정체성」(禮茶文化연구소, 2014), 「한국 性理學에 나타난 한국인의 정체성」(부산대학교, 2015), 「왜 人文學인가」(부산중앙포럼, 2019) 등 10여 편의 논문과 『古今茶話』(시민시대), 『般若心經 禪解』(담앤북스,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金剛經 講解 上
제1 法會가 열린 緣由 [法會因由分]
제2 수보리가 法을 청함 [善現起請分]
제3 大乘의 발현 [大乘正宗分]
제4 머묾 없는 妙行 [妙行無住分]
제5 如來의 참모습을 보다 [如理實見分]
제6 올바른 믿음은 希有하다 [正信希有分]
제7 얻음도 없고, 말함도 없다 [無得無說分]
제8 불법은 空性에서 나오다 [依法出生分]
제9 하나의 相에도 相이 없다 [一相無相分]
제10 淨土를 장엄하다 [莊嚴淨土分]
제11 위함 없는 福은 뛰어나다 [無爲福勝分]
제12 바른 가르침을 존중하다 [尊重正敎分]
제13 法다이 받아 지니다 [如法受持分]
제14 相을 여의고 寂滅에 이르다 [離相寂滅分]
제15 經을 지녀서 읽고 쓰는 공덕 [持經功德分]
제16 전생의 業障을 소멸하다 [能淨業障分]
金剛經 講解 下
제17 마침내 無我에 들다 [究竟無我分]
제18 중생과 부처를 한 몸으로 보다 [一體同觀分]
제19 붓다의 法을 세상에 펴다 [法界通化分]
제20 색신과 32相을 떠나다 [離色離相分]
제21 說한 바 說함이 아니다 [非說所說分]
제22 法을 얻음도 없다 [無法可得分]
제23 깨끗한 마음으로 바르게 수행하다 [淨心行善分]
제24 福德과 智慧는 비교할 수 없다 [福智無比分]
제25 가르쳤으나 가르친 바가 없다 [化無所化分]
제26 法身은 相이 아니다 [法身非相分]
제27 끊김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無斷無滅分]
제28 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는다 [不受不貪分]
제29 法身의 움직임은 고요하다 [威儀寂靜分]
제30 이치와 相이 하나가 되다 [一合理相分]
제31 알음알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知見不生分]
제32 應身은 眞身이 아니다 [應化非眞分]
부록
『금강경』 해제
『金剛般若波羅蜜經纂』
參考文獻
역자 소개
『금강경』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석가모니부처와 그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수보리존자須菩提尊者의 문답 내용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붓다와 수보리의 대화’이다. 이 경 앞부분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한 것은 붓다의 입멸 이후, 붓다의 측근 시봉侍奉이었던 아난阿難이 500여 아라한阿羅漢 앞에서 자신이 들은 내용들을 구술口述할 때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유래된 것이다.
이에 따라 팔만대장경의 첫 장 첫 구절은 대개 이와 같이 ‘여시아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여시如是’는 『금강경』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붓다가 생전에 설한 것을 화자話者인 아난존자 개인의 독단이나 편견이 아님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따라서 『금강경』뿐 아니라 경전 대부분의 서두는 모두 ‘여시아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단 이 경을 한역한 구마라집은 『금강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에서 ‘여시아문’ 이라고 하였으나, 구마라집보다 약 150년 앞선 강승개康僧鎧는 조위曹魏 가평4년(嘉平, AD.252)에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을 한역하면서 ‘나는 들었다. 이와 같이[我聞如是]’ 라고 하여 ‘아문’과 ‘여시’를 도치倒置하였다.
// 35~36p < 제1 법회인유분 > 가운데
붓다는 이러한 구류중생九類衆生을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모든 중생을 적적요요寂寂寥寥한 안락세계로 이끌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 붓다는 다시 ‘이와 같이 한량없고 끝없이 많은 중생을 구하려 해도 실제로 멸도를 얻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며 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붓다는 제2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의 질문을 받고 ‘어떻게 이런 훌륭한 질문을 하였는가![善哉善哉]’ 라고 칭찬하면서 ‘ 선남자선여인이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을 때, 마땅히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다스릴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라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제3 「대승정종분」에서는 청천벽력같이 냉철한 어조로 돌아서서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다. 그런 다음 ‘왜 그런
가?’라며 그 까닭을 설명한다.
이것을 육조 혜능은 “ 일체의 미혹한 사람이라도 자성을 깨닫게 되면, 부처는 스스로의 상相도 보이지 않고, 스스로의 지혜도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되니, 어찌 중생을 제도했다 하겠는가! 다만 범부가 자기 본심을 보지 못하고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해, 모든 상에 집착하여 무위의 이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인我人을 없애지 못하므로, 중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이 병을 여의게 되면 실제로 중생이 멸도를 얻었다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망심이 없는 곳이 바로 보리菩提이고, 생사열반이 본디 평등하여 없는 것인데 어찌 멸도가 있다고 말하는가!”라며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 63~64p < 제3 대승정종분 > 가운데
요컨대 붓다의 교설을 이해하려고 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공空과 무無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이해이다. 흔히 공은 비었음을 말하지만, 불가의 본디 뜻은 ‘텅 빈 충만의 세계’로서 진실로 비웠을 때 드러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이다. 이러한 공의 세계는 무無를 품고 유有를 드러내어 끊임없이 생성과 파괴를 되풀이하는 무한생명無限生命으로서 무한의식세계無限意識世界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유有와 무無에 대한 이해이다. 즉 ‘있음’은 ‘없음’에 의거하여 나타나고, ‘없음’은 ‘있음’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일 수 없고, 긍정은 긍정을 위한 긍정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無我와 무심無心이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자아自我는 두고 불필요하게 망상을 부리는 가아假我를 구분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 86p < 제5 여리실견분 > 가운데
예컨대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워 보시한다는 것은 세간에선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보시도 ‘베푼다는 상相’을 지닌 보시는 언젠가는 무너져 사라지기[有相有限] 마련이다. 하지만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으로 맑고 깨끗하게 이끄는 법보시는 상이 없고 담박하여 없어지지 않는다[無相無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장의 제목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무위의 복덕’이 ‘대가를 바라는 유상유위의 복덕’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재보시와 법보시를 규봉 선사는 “보시는 생사生死에 감응感應함이요, 경經은 보리菩提로 나아감이니, 큰 뜻은 위의 경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또 야부 선사는 “바다에 들어가 모래알 수를 헤아림은 한갓 힘만 허비함이니 / 곳곳마다 홍진紅塵에서 벗어나지 못함이라 / 어찌하여 내 집의 진귀한 보배를 꺼냄이 / 고목에 꽃 피우는 특별한 봄만 같다 하리오!”라며 항하사를 헤아리듯 하는 재보시財布施와 내 안의 자기를 밝히는 법보시法布施를 비유하여 읊었다.
// 151~152p < 제11 무위복승분 > 가운데
요컨대 붓다가 지금까지 설한 것은 ‘불성佛性이란 의식意識을 넘은 무의식無意識에 바탕 한 무위법으로, 이러한 무위법을 깨달았을 때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위법은 누가 알아서 안겨 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에게 본디 갖추어져 있으므로 오로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메시지이다. 요컨대 붓다가 연등불이 지닌 법을 이어받은 바가 있다면, 결코 연등불의 수기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가 말하는 불성에 이르고자 하는 법은 문자 그대로 특정한 모양[相]이나 집착이 없는 무위無爲이다. 만약 모양과 집착이 있다면 무상정등각의 지혜도 아닐뿐더러, 깨달음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가에서 말하는 존재의 본질이란, 취取하거나 버림[捨]이 없는 본디의 자리를 깨달아 나도 없고 대상도 없으며, 갖춤도 없는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이다. 그래서 연등불이 석가모니붓다에게 수기한 것은 이와 같이 상과 집착이 없는 보살행을 보고 수기를 내렸을 뿐, 당시 바라문교나 자이나교에서처럼 별도의 법을 전하거나 받은 것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구분하고자 한 것이다.
// 228p < 제17 구경무아분 > 가운데
요컨대 여래의 법신은 상도 아니고[非相], 상 아님도 아니다[非非相]. 그러므로 옴[來]도 없고 감[去]도 없어 동動과 정靜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여래의 상相은 하늘의 달과 물속의 달로써 여래의 법신과 색신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즉 물속의 달은 비바람과 물결, 구름 등의 변화와 조건에 따라 여러 형상으로 변할 수 있지만, 하늘의 달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따라서 물속의 달이 사라지는 것은 구름이달을 가렸기 때문이며, 물속의 달이 움직이고 흔들리는 것은 바람으로 일어난 물결 때문인 것으로 달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맑고 고요하면 변함없는 부처의 법신을 볼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흐리고 산란하면 법신은 보이지 않고, 색신인 몸의 움직임만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법신의 여래는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으므로 이름하여 여래라고 한 것이다.
// 309p < 제29 위의적정분> 가운데